일반 수필

'오징어 게임'의 죄와 벌

장 산 2021. 11. 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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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오징어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난리라고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한국말로 부르고, 어릴 적 골목길에서 하던 딱지치기달고나 뽑기’를 우리보다 더 신나게 따라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재미는 규칙(rule)의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구나 금방 룰을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한 계산이나 지식이 필요 없어 사회생활 능력이 승패에 하등 영향을 못 미친다. 오히려, 옛날에 많이 해봤다고 서로 만만하게 여긴다.

 

이렇게 간단한 게임이지만 무시무시하게도 결과는 생사(生死)를 가른다.

프랑스 혁명기의 단두대(guillotine)처럼 가차 없이 패자의 숨통을 끊는다. 조금의 주저함과 자비도 없다. 마치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불가항력적이다.

 

사실 이런 게임이라면 신()이나 돼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1번 노인이 아무리 돈이 많고, 또 참가자가 스스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런 벌은 너무나 가혹하다. 누가 그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을 절단 낼 권능(權能)을 주었는가를 묻게 되는 이유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는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한 청년이 나온다.

어떻게 해도 삶이 괴로운 현실에서, 그는 근근이 연명(延命)하는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이다.

이에 반해, 노파는 그런 사람들에게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그들 삶 위에 군림하고 있다. 빈자(貧者)의 피를 빨아먹는 ‘이’ 같은 인간이니 죽어 마땅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노인 오일남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모두 자기가 불행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듯하다.

한 사람은 456억 원의 천문학적 사재(私財)를 돈이 궁한 사람에게 내어놓았고, 다른 사람은 약자(弱者)를 대신해서 돈만 아는 악인(惡人)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간의 약점을 극복한 초인(Übermensch)이 되고자 했을 법하다.

 

반면에, 선한 의도에 대해 처벌을 받는다는 점에선 라스콜리니코프가 불만일 수도 있다.

오일남은 아무 페널티(penalty)도 받지 않으나 자신은 시베리아 유형(流刑)의 벌을 받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일남'은 구슬치기에서 졌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물론 깐부를 살리기 위한 특별 계획변경’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결국 룰을 위반한 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불공정하다고 할 선례(先例)를 만든 것이다.

 

그러고 보면 ‘1번 노인 오일남이 진짜 초인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든 규칙대로 인간을 갖고 놀면서도 자신은 그 너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정이 어떠하든 본인 앞에는 생사의 갈림길이란 없고, 다만 타인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이 있을 뿐이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건, 게임이 종료된 뒤 자신을 찾아온 깐부 성기훈에게 내뱉은 말이다.

그는 ‘돈이 없는 사람과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의 공통점은 둘 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것이라고 슬며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는다. 말이야 맞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마치 인생이 심심해, 아니면 얼마 남지 않은 살날이 억울해 이런 생존게임을 만들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굳이 사람 목숨 값으로 1억을 책정해 깡그리 다 죽여야 직성이 풀렸을까.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영혼이 맑은 소냐의 지극한 사랑 앞에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

생각이 많은 23세의 법학도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도시에 만연한 빈부격차와 향락, 온갖 부조리로부터 사회정의를 지키기 위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끼로 주저 없이 노파를 죽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나 세상은 살인 이전과 바뀐 게 없고, 그는 자신이 경멸했던 창녀에게서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

 

<오징어 게임>에서 오일남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도둑질이나 사기가 아니라면, 여느 사람들처럼 눈물겨운 과정을 거쳤으리란 짐작은 간다. 인간에게 돈이 어떤 의미 인지를 에누리 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처지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마침내 부자가 되었으니 돈의 힘을 이용해 신분상승을 하고, 또 사회적 영향력을 원 없이 행사했을 법하다.  

 

혹시 모르겠다, 그래서 인생이 더 허무하게 느껴질지. 침대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에게 돈이 무슨 소용일까 싶긴 하다. 유치한 <오징어 게임>을 만들고, 옛날 살던 집을 애잔하게 찾는 걸 보면 '가난해도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 같기도 하다.

실제로, 어릴 때 놀던 순수한 즐거움을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오일남'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노파 한 사람 죽인다고 세상이 변하지도 않고, 상금이 많아진다고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도 아니다.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은 사회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leviathan)'으로 몰아넣을 게 분명하다.

비록 병 주고 약 주고 하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세상을 만들었으니 그렇게 나름 돌아갈 것이다. 인간은 심판자가 될 수 없다. 

 

<오징어 게임>의 감동을 위해서는 ‘1번 노인도 순리대로 죽었어야 마땅하다.

죽음으로써 빈자들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어야 했다. 만약, 모두에게 순순히 1억씩 나눠줬다면 그는 455명을 자기 장례식 문상객(問喪客)으로 만들었을 게 틀림없다. 

 

달고나 뽑기좀 잘못했다고 죽는 게 말이 되는 시추에이션(situation)인가. 그럴 바에야, 게임 참가자를 모집할 때의 딱지치기처럼 귀싸대기 몇 대 맞고 푼돈이라도 버는 게 훨씬 합리적이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규칙은 O·X처럼 쉬울 수 있어도 현실의 삶이 결코 양자택일일 수는 없다.

□나 도 있을 수 있다. 혹은, 다 정답이거나 모두 아닐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좋든 싫든 땅에서 넘어진 자는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因地而倒者  因地而起). 삶의 터전을 벗어나 자기 위치도 모르고 그저 일확천금을 노리며 살 순 없다.

 

영화는 컷(cut)이 있어도 사는 것은 다시 할 수 없다. 확실히, 삶은 영화보다 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