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수필

평생 배운 게 이겁니다

장 산 2021. 2. 25. 00:36

 잡기에 만능인 한 친구가 있다.

그렇다고 술을 잘 먹는 건 아니다. 공 가지고 노는 것 중에 못하는 게 없다. 제 딴엔 열심히 노력해서 겨우 잘하는 것 하나 챙긴 다른 친구들 중에는 뭐든지 잘하는 이 친구를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친구가 40대 초반 시절에 국가대표 출신 모 실업 탁구팀 감독과 일전(一戰)을 벌인 적이 있었다. 

88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그는 현역 은퇴 이후 한참 지났어도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마침 그 친구가 다니던 탁구장 주인이 여자 청소년 대표 출신이라 개장 축하행사로 그 감독을 초청한 것이었다.


 이 친구는 자기가 다니던 탁구장에서 소위 귀신 소리 듣던 고수였다.

탁구장 회원들 중에는 적수가 없어 맨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사람들 골려먹는 게 취미였다. 탁구장 주인도 실력을 인정해 공개적으로 거의 국가대표 수준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당시 이벤트 행사는 R 감독의 서비스를 10개 중 한 개라도 받아넘기면 상품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탁구장에서 나름 방귀 좀 뀐다는 사람 너 댓 명이 참가자로 선정되었는데, 아마 평생 기억에 남을 일이었을 것이다.

 

<88올림픽 탁구결승전>, 출처: thePingPong


 사실 친구는 정식 게임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이 기회에 동호회원들한테 멋있는 자기 모습도 좀 보여주고, 선수 출신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기는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자기도 나름 꽤 점수를 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브만 받아넘기는 이벤트라고 해서 좀 실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벌써 탁구장 주인과 R 감독은 다 계획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오랜 기간 운동을 하고 국가대표까지 지낸 선수들 눈에 사실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잘한다고 해봐야 순진한 아마추어밖에 더 되겠나? 그저 열심히 하는 아마추어 기 안 죽이려고 잘한다고 맞장구쳐 준 것인데, 친구만 진짜 자기가 국대급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나 그들의 예상대로 결과는 10:0, 서브를 한 개도 못 받아넘겼다고 한다.

R 감독의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기술에 손도 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본인이 맨날 놀려먹던 동호회 하수들과 똑같은 꼴을 당한 것이다. 그 친구로서는 일생일대의 굴욕이었다. 게다가 주위에서 지켜보던 회원들도 현실을 알아챘을 테니 창피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할 데로 상한 친구가 씩씩거리며 ‘아니 어떻게 그렇게 탁구를 잘 치세요?’라고 R 감독에게 따지듯이 물었다는 것이다.

그때 R 감독은 싱긋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는 평생 이것만 배웠습니다. 선생님이 대학교수 되시려고 공부할 때 저는 탁구만 쳤습니다라고.

하도 억울해서 R 감독 대신 같이 온 O 코치와 다시 대결을 신청해 겨우 몇 개 넘겨 상품을 받았다고 한다. 알고 보니 O 코치는 마침 친구의 고등학교 후배여서 은근히 압력 겸 사정을 해서 겨우 그거라도 성공했다고 한다.


 R 감독의 말뜻을 풀어보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당신은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교수 되지 않았나. 나는 당신이 공부할 동안 탁구 열심히 쳐서 국가대표도 되고 금메달도 땄다. 내가 지금 당신 하고 시험문제 풀기 시합 한 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탁구 잘 치는 건 너무나 당연하고 그게 내 자존심인데 당신이 굳이 약 올라 할 이유가 없다. 내가 만약 당신 하고 당신 전공내용 시험 보기를 해서 내가 더 잘 봤다면 당신은 어떤 심정이겠나?’


 사실 R감독의 말은 너무나 솔직하고 당연한 것이다.

어느 분야의 누구든 오랜 기간 피땀 어린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최고의 경지에 오르기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그들은 너나없이 긴 시간 동안 눈물 나고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을 묵묵히 견뎌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인고(忍苦)의 과정을 겪고 난 사람들은 그 분야가 무엇이든 그간의 노고를 이해해 흔쾌히 승자를 축하할 수 있는 것이다.


 이후 R 감독과 그 친구가 재대결을 했다는 얘길 듣지는 못했다.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니 일부러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 시간이 많이 흘러 R 감독의 경기 감각이 좀 무뎌져서, 아니면 친구가 겸손해져 서로 내심 만나길 원치 않았던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떻게 해도 탁구만큼은 객관적으로 친구에게 불리한 게임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