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를 시골 촌동네에서 만나다
잘 알려진 대로,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는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소설이다.
니체와 불교에 심취했던 저자는 ‘조르바’를 통해 기존의 권위나 남의 평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범상치 않은 사람’, 즉 초인(超人)의 삶을 그려내고자 했다.
조르바의 말은 거침이 없고, 행동엔 주저함이 없다.
하고 싶은 건 참지 않고 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지중해 출신답게 술과 노래, 춤은 물론이고 여자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한다. 그저 인간으로서 인간세상에 사는 현재를 즐길 뿐이다.
조르바는 유한하고 우연으로 가득 찬 부조리한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그는 말한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을 일으키는 거예요.......인생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이지요.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브레이크를 쓰겠지만, 나는 브레이크를 버린 지 오랩니다. 나는 꽈당 부딪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거든요’
대략 이것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모습이다.
아마 조르바는 평생 일하는 게 이골이 났을 테니 굵은 손마디에 손바닥은 거칠고 노구(老軀)에도 몸은 여전히 단단할 것이다. 소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껌뻑이며 큰소리로 제스처를 섞어 말할 땐 틀림없이 듣는 사람들이 끼어들 엄두를 못 낼 것이다.
재미있는 우스개 소리도 적당히 타이밍 맞춰 풀어낼 게 뻔하다.
사실 이 모습은 시골 동네 아는 형님의 특징과 영락없이 일치한다.
나이로는 거의 아버지뻘이지만 어찌어찌해서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윗대부터 오래 같이 살았으니 친형님이나 마찬가지인 분이다.
일흔을 훌쩍 넘기셨지만 6 척이 넘는 큰 키에 손바닥은 솥뚜껑 만해 덩치에 움찔했다가 손에 완전 기죽고 만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거짓말 좀 보태 우리 엄지손가락만큼 굵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세니 당연히 다른 사람들보다 농사 소출(所出)이 좋다.
그 몸뚱이 하나로 아무것도 없는 집에 부농을 이루었으니 다들 부러워할 만하다.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뿌듯하실 게다.
술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해 함께 있으면 옛날 얘기가 끝도 없다.
말도 재미있게 해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면소재지에 있는 다방에도 더러 놀러 가는데, 젊은 아가씨하고 농담도 잘해 인기가 좋다. 옛날에는 형수님 속을 참 많이도 썩였다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어 논리가 정연하다.
촌사람이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크게 우사를 당할 수 있다. 간혹 서로 의견이 달라 부딪히기도 하지만 목소리만 좀 커지는 거 말고는 성을 내거나 욕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막무가내로 젊은 사람이라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덩치만큼이나 성격도 시원시원하시다.
마을에 어려운 사람, 일손이 필요한 사람 있으면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한다.
젊은 사람이 좀 있지만 마을 대소사를 남에게 미루지 않는다. 다들 농촌에서 흙 파먹고 사는 걸 꺼리는 게 현실이지만 오히려 농촌 생활이 당신에겐 맞는지 늘 즐겁게 사신다.
한 가지, 요즘 집 주변이 점점 빈집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왠지 마음이 쓰이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특히 그나마 남아 있던 옆집마저 비워버려 이제 스산한 빈집들과 담을 맞대게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항우(項羽) 장사라도 어찌 비켜갈 수 있을까.
그래서인지 가끔씩 시골 빈집에 들릴 때면 여간 반가워하시지 않는다.
술이라도 한 잔 하면, 돌아가신 부모님 얘기하면서 배고팠어도 옹기종기 모여 살던 그때가 좋았다고 연신 말씀하신다. 그럴 때면 나도 참 공감이 된다.
막 혼인을 한 형님이 살아 보려고 닭장을 만들었을 때, 닭 모이로 개구리를 잡아 철망에 걸어 두던 어릴 적 생각도 났다.
거침없이 얘기하고, 이익 따지지 않고 행동하며, 자기의 일을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을 마음으로 도와주는 건 조르바나 우리 형님이나 매 한 가지인 것 같다.
무엇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충실하다. 물론, 술과 여자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다만, 그리스인 조르바가 지형적인 영향인지 좀 다혈질적이고 제멋대로인데 반해 우리 시골 형님은 훨씬 순박한 촌사람이다.
자유롭지만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고나 할까?
하여간, 형님이 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