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異邦人)은 나와 상관없거나 모르는 사람을 말한다.
그저 남이어서, 나도 잘 모르고 그도 나를 속속들이 알 리 없다. 서로 아는 게 없으니 선입견이나 원망(怨望)이 있을 리 만무하다.
어떨 땐 이방인처럼 서로 모르는 게 편할 때도 있다.
서로 잘 알면 마음이 쓰이기 마련이라, 좋으면 좋은 대로 또 나쁘면 나쁜 대로 얽매이게 된다. 이래저래 마음의 부담이 없을 수 없다.
부담(負擔)이란 말 그대로 등에 짊어진 짐(burden)이다.
짐이 무거울수록 행동이 부자유스러운 건 당연하다. 바둑에서 ‘중요한 대국에 명국(名局) 없다’는 얘기도 있고, 운동선수도 큰 게임에서 실력 발휘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요한 치과치료를 가족·친구에게 맡기지 말라’는 설(說)도 있다. 부담감에 손이 떨린다는 것이다.
말도 그렇다.
뭔가 거북하게 느껴지면 대화가 지속되기 어렵다. 이게 심해져 할 말이 가슴에 쌓이면 화병(火病)이 된다. 그저 입 밖으로 내뱉기만 해도 그렇게 도지진 않을 것이다. 상담의 첫 번째가 ‘들어주기’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이건 가까운 사이라고 저절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듯하다.
가족이라도 잘 안다고 마음에 있는 얘길 다할 순 없다. 오히려, 괜히 하고나서 뒷감당이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나.
게다가, 얘기의 대상이 바로 내 앞에 있는 당사자일 가능성이 십중팔구이다. 몇 마디만 해도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의 역할구분은 사라지고, 서로 따지고 들기 십상이다. 믿었기 때문에 더 아플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부서 내에서는 특히 다른 사람 얘기하기가 조심스럽다. 나중에 돌고 돌아 무슨 말 들을지 알 수 없다. 학교, 군대, 혹은 아파트단지 등 어디라도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는 하고 싶은 얘기 다하며 살긴 어렵다.
이럴 때, ‘중요한 이방인(consequential stranger)’ 이 있으면 속풀이를 좀 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직 루빈(Zick Rubin)이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나와 좀 느슨한 관계에 있어 부담 없이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자주 가는 미용실, 목욕탕, 단골 음식점, 시장(市場), 등산이나 여행지 등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밀접한 관계에서처럼 긴장하고 부담을 느낄 이유가 없다.
각종 운동이나 예술 동호회도 마찬가지이다. 설사 관계가 좀 틀어져도 잃을 게 없다는 안도감과 가벼운 해방감이 경계심을 완화시킨다.
그들은 내 말의 진위(眞僞) 여부와 등장인물에는 큰 관심 없이 그저 청자(聽者)가 되는 사람들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인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쉽게 얘기하지 않나.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 한다는 부담과 아는 사람에게 소문 낼 걱정이 없어 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가볍게 만나는 사람들이 더 반가울 때가 많다.
없던 활력(活力)도 생기고 심지어 이타적이 되기도 한다. 즐겁게 소통하면서 이런저런 정보들을 공유하고 삶의 힌트도 얻는다.
‘중요한 이방인’은 꼭 만나야 하거나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아니다.
부담이 없어 그런지 점점 이런 관계들에서 위안을 얻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듯하다. 각종 SNS에 사진과 댓글들이 난무하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의미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이미 지쳐있는지 모르겠다.
손쉽게 소통하면서도 더 간절히 나를 모르는 사람을 찾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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