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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에 대한 단상(斷想)

늘 그렇듯, 사·오월은 집안에만 머물기 참 어려운 계절이다. 겨울을 이겨낸 신선한 기운(氣運)들이 천지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온유한 햇살과 산들바람, 물 오른 나무와 만개한 꽃들, 분주히 움직이는 곤충과 새들, 반짝이는 시냇물과 파닥거리는 고기떼들... 이맘때의 풍경은 어떤 복잡한 마음의 꼬임이라도 순식간에 해체해 버린다. 알 수 없는 에너지에 순순히 동화(同化)되고 만다. 충만한 생기(生氣)를 느끼며 걷는 일은 축복이다. 야외활동이야 사실 여름이 더하겠지만 높은 에너지는 사람을 쉽게 들뜨게 한다. 마음의 심란(心亂)은 에너지가 불균형일 때 오기 쉽다. 모자라거나 과하지 않을 때 마음이 평온해지는 건 익숙한 경험칙(經驗則)이다. 가을이 이런 의미에서 걷기 좋은 계절임은 봄처럼 확연하다. 오래되거나 혹은 ..

일반 수필 2022.09.05

핵무기와 재력

과거 80년대 마이크 타이슨이라는 괴물 같은 권투선수가 있었다. 펀치가 얼마나 셌던지 거의 모든 시합을 KO로 이겼다. 한 방 맞았다 하면 경기가 끝나버려 그의 별명은 ‘핵주먹’이었다. 핵은 한 방으로도 전쟁을 종결 지을 수 있는 절대무기이다. 에 나오는 ‘절대반지’와 같다. 핵무기를 보유하는 순간, 국가 간 힘의 균형은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이런 힘의 비교우위는 능력이 안 되는 나라를 눈치 보고 주눅 들게 만든다. 핵무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사용되지 않을 때 힘을 발휘한다. 실전(實戰)에 활용된다면 그땐 서로 ‘확증파괴(MAD)’가 되어 모두 공멸(共滅) 하기 때문이다. 말인 즉, 핵을 못 가진 나라에게만 통하는 공갈무기라는 의미이다. 없는 국가에게 ‘나 이런 거 있어, 까불지 마’ 하는 식이다. ..

일반 수필 2022.01.08

고 통

그럴 수만 있다면, 고통(苦痛)은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칼에 베이고 총에 맞은 그 순간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넘어져 어디가 깨질 때도 몹시 아프다. 치통이나 두통도 사람을 못내 성가시게 만든다. 고행자(苦行者)가 아니라면 고통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하기도 어려운데 고통이라니, 말하나 마나 한 얘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진정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지 않다면 고통도 모를 것이다. 괴롭지만,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생존은 고통을 통해 각성(覺性)된다. 어울리지 않아도, 고통은 삶과 한 통속이다. 고통은 상처부위가 아물면 사라진다. 순간의 고통이 아무리 강렬해도 아문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총..

허심탄회한 대화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있었다. 경상도 가족이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늘 서로 핀트가 안 맞다. 특히 사오정 같은 남편은 엉뚱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예를 들면, ‘둘째 아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당신 뭐 했어?’하고 호통을 치면 집사람이 ‘우리 아는 하납니다’ 하는 식이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집안만 대화가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기업, 학교, 병원, 동호회 등 사람이 모인 어디나 소통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검찰, 군대 등 소위 군기가 센 집단일수록 특히 더 하다. 조직 특성상 속도와 결과를 중시해 의사결정이 상의하달(上意下達)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는 대게 소통도 날 잡아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회식(會食)을 통해..

일반 수필 2021.12.15

도루묵은 죄가 없다

겨울철 별미로는 도루묵도 한몫한다. 지글지글 구이도 좋고 보글보글 찌개도 맛있다. 추운 날 도루묵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면 몸도 마음도 금방 풀리게 마련이다. 바닷가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도루묵은 동해안에서 주로 나는 한류성(寒流性) 어종이다. 겨울철에 동해안으로 내려와 알을 낳는데 옛날에는 흔해 빠져서 버리던 물고기였다. 그러다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대규모로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늘도 없고 크기도 적당해 먹기에 딱 좋다. 도루묵이란 이름은 선조가 피난 중에 ‘묵’이라는 고기를 먹고 맛있어서 ‘은어(銀魚)’라 이름 붙였는데 환궁(還宮)해 먹어보니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먹을 게 없을 땐 뭐든 맛있겠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있던 입맛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분명, 산해진미(..

기억과 감정

동물도 기억과 감정이 있다. 유튜브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많다. 어려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던 사자(lion)는 야생으로 돌아가 한참이 지난 뒤에도 함께 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부비면서 격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야생의 사자가 사람에게 달려들 때면 짧은 시간이나마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혹 저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다. 여간한 관계가 아니고선 다른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사자가 아니라 들개만 해도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동물도 이런 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오죽할까. 이산가족 상봉에서 보듯 애틋한 감정은 수십 년이 흘러도 헤어지던 그대로 생생하다. 오래된 유물(遺物)처럼 세월의 먼지와 때를 이고서 고스란히 감춰져 있다. 좋은 기억..

동네 목욕탕

동네에 자주 들르는 목욕탕이 있다. 좀 오래되었지만 거리가 가까워 좋다. 게다가, 코로나 영향인지 여하간 사람들이 적어 한가하기까지 하다. 어떨 땐 독탕(獨湯)을 쓸 때도 있는데, 주인 입장에선 영 마음이 개운치 않을 듯하다. 아침 운동을 하고 목욕탕에 가면 꼭 하는 절차가 있다. 2천 원으로 샤워용품 하나를 사는 것과 500원짜리 동전 2개로 바꾸는 것이다. 동전은 집에 있는 저금통에 밥을 주기 위해서인데, 동전이 떨어지면 물론 돼지도 굶을 수밖에 없다. 그날도 평소처럼 동전으로 바꾸려는데 1천 원짜리 지폐가 하나밖에 없었다. ‘돼지가 오늘 밥을 굶겠구나’ 싶었는데 2달러짜리 지폐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행운의 상징으로 친구에게 받아 쟁여뒀던 거였다. 환율을 생각하면 2달러로 충분한데, 판매대 아저..

보드카와 소주

러시아 보드카(vodka)는 독주(毒酒)의 대명사쯤 되어 있다. 술 좀 하는 주당(酒黨)들 중에는 차별성 부각을 위해 일부러 찾기도 한다. 무색·무미·무취의 3무(無)가 특징인데, 특히 추울 때 체온 유지에 딱 좋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도수는 일반적으로 40도여서 사실 아주 높은 건 아니다.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D. Mendeleev)가 가장 이상적인 도수로 40도를 주장한 이후 1894년부터 이렇게 고정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가 몸에 가장 잘 흡수되고, 맛도 좋다는 것이다. 한때 러시아에서 보드카를 즐겨 마신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할 것도 없이 미국 거지가 양주를 먹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추운 겨울에 보드카의 걸쭉한 얼음 알갱이가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느낌은 전율이었다. 오..

역치(threshold)

역치(閾値)란 생물이 외부 자극에 반응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기준을 말한다. 방의 문지방(threshold)과 같아, 좀 높으면 다니기 불편하고 너무 낮아도 쓸데없는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 역치가 높으면 무시해선 안 될 징후들을 빠뜨릴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낮으면 의미 없는 자극들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전자장치에도 스레시홀드는 적용된다. 비행체를 탐지하는 레이다의 경우 기준치를 너무 크게 하면 작은 것들을 놓칠 수 있고, 너무 낮췄을 땐 새떼들을 비행기로 오인할 수 있다. 속도 설정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조명의 밝기나 음량 조절에도 역치가 활용된다. 우리 감각은 어느 정도 이상이 돼야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데, 시각은 8%, 청각은 5%라고 한다. 기존에 있던 감각과 비교해 상대적 차이만을 인식한..

'오징어 게임'의 죄와 벌

요즘 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더 난리라고 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한국말로 부르고, 어릴 적 골목길에서 하던 ‘딱지치기’와 ‘달고나 뽑기’를 우리보다 더 신나게 따라 하고 있다. 이 영화의 재미는 규칙(rule)의 단순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누구나 금방 룰을 이해할 수 있다. 복잡한 계산이나 지식이 필요 없어 사회생활 능력이 승패에 하등 영향을 못 미친다. 오히려, 옛날에 많이 해봤다고 서로 만만하게 여긴다. 이렇게 간단한 게임이지만 무시무시하게도 결과는 생사(生死)를 가른다. 프랑스 혁명기의 단두대(guillotine)처럼 가차 없이 패자의 숨통을 끊는다. 조금의 주저함과 자비도 없다. 마치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불가항력적이다. 사..

일반 수필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