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수필(원고지3장) 63

고 통

그럴 수만 있다면, 고통(苦痛)은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칼에 베이고 총에 맞은 그 순간의 고통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다. 넘어져 어디가 깨질 때도 몹시 아프다. 치통이나 두통도 사람을 못내 성가시게 만든다. 고행자(苦行者)가 아니라면 고통을 체험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행복하기도 어려운데 고통이라니, 말하나 마나 한 얘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에 우리는 진정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지 않다면 고통도 모를 것이다. 괴롭지만, 고통은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생존은 고통을 통해 각성(覺性)된다. 어울리지 않아도, 고통은 삶과 한 통속이다. 고통은 상처부위가 아물면 사라진다. 순간의 고통이 아무리 강렬해도 아문 상처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총..

도루묵은 죄가 없다

겨울철 별미로는 도루묵도 한몫한다. 지글지글 구이도 좋고 보글보글 찌개도 맛있다. 추운 날 도루묵 안주로 소주 한 잔 하면 몸도 마음도 금방 풀리게 마련이다. 바닷가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도루묵은 동해안에서 주로 나는 한류성(寒流性) 어종이다. 겨울철에 동해안으로 내려와 알을 낳는데 옛날에는 흔해 빠져서 버리던 물고기였다. 그러다 일본으로 수출되면서 대규모로 잡기 시작했다고 한다. 비늘도 없고 크기도 적당해 먹기에 딱 좋다. 도루묵이란 이름은 선조가 피난 중에 ‘묵’이라는 고기를 먹고 맛있어서 ‘은어(銀魚)’라 이름 붙였는데 환궁(還宮)해 먹어보니 그 맛이 아니어서 ‘도로 묵’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먹을 게 없을 땐 뭐든 맛있겠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면 있던 입맛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분명, 산해진미(..

기억과 감정

동물도 기억과 감정이 있다. 유튜브 등 다양한 자료들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많다. 어려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던 사자(lion)는 야생으로 돌아가 한참이 지난 뒤에도 함께 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부비면서 격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야생의 사자가 사람에게 달려들 때면 짧은 시간이나마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혹 저러다 큰 일 나는 거 아닌가 싶어서다. 여간한 관계가 아니고선 다른 사람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사자가 아니라 들개만 해도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동물도 이런 데 사람과 사람 사이는 오죽할까. 이산가족 상봉에서 보듯 애틋한 감정은 수십 년이 흘러도 헤어지던 그대로 생생하다. 오래된 유물(遺物)처럼 세월의 먼지와 때를 이고서 고스란히 감춰져 있다. 좋은 기억..

동네 목욕탕

동네에 자주 들르는 목욕탕이 있다. 좀 오래되었지만 거리가 가까워 좋다. 게다가, 코로나 영향인지 여하간 사람들이 적어 한가하기까지 하다. 어떨 땐 독탕(獨湯)을 쓸 때도 있는데, 주인 입장에선 영 마음이 개운치 않을 듯하다. 아침 운동을 하고 목욕탕에 가면 꼭 하는 절차가 있다. 2천 원으로 샤워용품 하나를 사는 것과 500원짜리 동전 2개로 바꾸는 것이다. 동전은 집에 있는 저금통에 밥을 주기 위해서인데, 동전이 떨어지면 물론 돼지도 굶을 수밖에 없다. 그날도 평소처럼 동전으로 바꾸려는데 1천 원짜리 지폐가 하나밖에 없었다. ‘돼지가 오늘 밥을 굶겠구나’ 싶었는데 2달러짜리 지폐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행운의 상징으로 친구에게 받아 쟁여뒀던 거였다. 환율을 생각하면 2달러로 충분한데, 판매대 아저..

보드카와 소주

러시아 보드카(vodka)는 독주(毒酒)의 대명사쯤 되어 있다. 술 좀 하는 주당(酒黨)들 중에는 차별성 부각을 위해 일부러 찾기도 한다. 무색·무미·무취의 3무(無)가 특징인데, 특히 추울 때 체온 유지에 딱 좋다.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도수는 일반적으로 40도여서 사실 아주 높은 건 아니다.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D. Mendeleev)가 가장 이상적인 도수로 40도를 주장한 이후 1894년부터 이렇게 고정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가 몸에 가장 잘 흡수되고, 맛도 좋다는 것이다. 한때 러시아에서 보드카를 즐겨 마신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할 것도 없이 미국 거지가 양주를 먹는 경우와 같다고나 할까? 하여튼, 추운 겨울에 보드카의 걸쭉한 얼음 알갱이가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느낌은 전율이었다. 오..

역치(threshold)

역치(閾値)란 생물이 외부 자극에 반응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기준을 말한다. 방의 문지방(threshold)과 같아, 좀 높으면 다니기 불편하고 너무 낮아도 쓸데없는 것들이 들어올 수 있다. 역치가 높으면 무시해선 안 될 징후들을 빠뜨릴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낮으면 의미 없는 자극들에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전자장치에도 스레시홀드는 적용된다. 비행체를 탐지하는 레이다의 경우 기준치를 너무 크게 하면 작은 것들을 놓칠 수 있고, 너무 낮췄을 땐 새떼들을 비행기로 오인할 수 있다. 속도 설정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조명의 밝기나 음량 조절에도 역치가 활용된다. 우리 감각은 어느 정도 이상이 돼야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데, 시각은 8%, 청각은 5%라고 한다. 기존에 있던 감각과 비교해 상대적 차이만을 인식한..

돛단배와 바람

바람의 힘으로만 움직이는 요트 시합을 본 적이 있다. 돛으로 동력을 얻으니 바람이 불어야 잘 달릴 수 있는 건 당연하다. 특별히, 뒤바람이 불어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말 그대로, 순풍에 돛단배가 되는 것이다. 노나 엔진이 없어 오로지 바람에만 의존하는 돛단배는, 그러나 갈 때 순풍(順風)이면 돌아올 땐 반드시 역풍(逆風) 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성난 파도까지 세일러(sailer)의 의지를 시험한다. 망망대해에서 실제 이런 상황을 맞는다면 누구라도 간절히 기도를 올릴 게 틀림없다. 놀랍게도, 뱃사람을 진짜 절망 상태에 빠트리는 건 역풍이 아닌 무풍(無風)이란 점이다. 고생은 되겠지만, 그래도 역풍은 움직일 힘을 준다는 것이다. 역풍 속에서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앞으로 전진하는 힘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

형과 아우

형제는 혈연으로 엮인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안 그런 경우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은 한 배에서 나 젖먹이 때부터 함께 한다.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티격태격하며 성장하듯이 그렇게 형제애가 깊어지는 건 인간도 마찬가지이겠다. 대체로 형과 동생은 두세 살 터울이 많다. 나이차가 많이 나면 동생 입장에서는 형이 아니라 삼촌이나 아버지 같이 느껴질 수 있다. 형님이라고 부르기가 곤란한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홍길동 같은 일이 지난여름 있었다. 선후배 몇 명이 등산을 하던 중이었다. 사전에 체온 재는 것도 난생처음이었고, 그냥도 숨이 찬데 마스크까지 끼니 죽을 맛이었다. ‘내가 왜 왔나’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산 중턱에서 잠깐 휴식할 때 누군가 팔순을 바라보는 대선배에게 덕담을 했다. “아이고 형님,..

중요한 물건

다행인지, 요즘 들어서 갖고 다니던 물건을 어디 놔두고 오는 버릇이 사라졌다. 금방 옆에 두고서 일어서면 홀라당 잊어 먹곤 했었다. 비올 때 멀쩡한 우산 버리고 일회용으로 다시 산 게 부지기수였고, 핸드폰도 몇 번을 놓고 왔는지 모르겠다. 우산이야 뭐 그렇다 쳐도 핸드폰을 놔두고 오면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대부분은 아는 곳에 두고 와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있지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은 ‘혹시나’ 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물건을 담았던 작은 봉지도 자주 버리고 왔다. 잘 뒀다 가져가야지 하면서 고이 두고선 돌아서면 깜빡 잊어버렸다.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앉았다 하면 들고 온 걸 까먹는 게 일이었다. 이랬다가 기막힌 요령이 생긴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누구 도움을 받지도..

함께 있어 힘이 되는 존재

내게 도움이 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건 인지상정(人之常情) 일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으니 알고 지내면 여러모로 편리할 게다. 흔쾌히 도와주든 마지못해 그러든 하여간에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이런 접근법이라면,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을 가까이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움은커녕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면 ‘차라리 안 봤으면...’ 할 수도 있다. 나도 힘든 데 굳이 필요 없는 사람까지 챙기기란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 ‘아틱(Artic)’은 북극에서 조난된 한 남자의 처절한 생존 과정을 다큐 형식으로 그려낸 영화이다. 엄청난 눈보라가 수시로 불어대고 사방이 온통 눈 천지인 고립무원의 땅에서 주인공은 하루하루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사투(死鬪)를 벌인다. 그러다 인근에 추락한 헬기에서 중상을 입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