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이 오래되고 헷갈리는 물음에 대해 ‘알이 먼저다’라는 주장을 남다르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닭은 유전자를 존속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매개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알에 있는 유전자들이 후대로 계속 전승되도록 하는 것이 ‘존재 이유’라는 논지인데 듣고 보니 그럴듯하다. 개체는 사라져도 유전은 지속되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닭을 만들어냈을 ‘시조 알’의 발견에 근거한 것은 아니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라는 생물학자의 주장이다. 그는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효과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전자는 자기 보존을 위해 그것이 깃들어있는 개체에게 항상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 생존의 의미가 인간이성과 상관없는 유전자 전파라는 의미이다.
생존을 위한 이기적 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유전자 때문이다?
솔직히 ‘맞고 틀리고’를 떠나 믿고 싶지 않은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일상의 행위들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전자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니 말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 대표되는 근대의 인식체계가 한순간에 폐기되는 순간이다. 이 말대로라면 자자손손 누대를 이어온 우리 공동체에는 결국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우량 유전자들만 남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 사는 세상이 완전히 이런 우량종들로만 채워지지는 않은 듯하다.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수많은 불량 유전자들을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소심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혹시 유전자를 잘 못 타고나 남 좋은 일만 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가타카(GATTACA)’라는 우주탐사 공상과학 영화에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우성(優性)의 동생 안톤과 자연적인 인간 관계로 태어나 열성(劣性) 유전자를 물려받은 형 빈센트가 바다에서 수영시합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선천적 심장질환에 기껏해야 서른 살까지만 살게 돼있는 빈센트가 안톤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고 할 수 있다. 데이터로 나타나는 형제의 신체능력은 과학의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수만 번 반복해도 똑같은 결과가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난다.
있을 수 없는 결과에 의아해하는 동생에게 형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부족한 걸 알기 때문에 오로지 시합에만 전념했다. 그래서 너같이 너무 멀리 나가서 못 돌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결국 형 빈센트는 인간의 의지로 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최종 선발자가 되어 우주로 날아오르게 된다.
모든 인과관계를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인간의 의지를 도외시한 불완전한 평가임에 틀림없다.
사람에게는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sollen)의 가치체계가 있다. 인간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더라도 희생할 줄 아는 종(種)이다.
저자 자신도 이런 비판을 고려하여, 인간에게는 희생과 봉사라는 이타심도 있다는 사실을 이후 인정한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니 이기적이지 못해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겠다.
오히려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눈에 띄면, ‘아, 저 친구 지금 하찮은 유전자의 조종을 받고 있네’라고 좀 측은하게 바라보면 될 일이다. 내가 그러지 못 해 안달 할 일은 절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최재천 교수의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는 용어가 마음에 와 닿는다.
이제 과거와 같은 방식의 자연에 대한 일방적 이용, 소통하지 않는 이기적 인간상으로는 미래에 생존할 수 없으니 새로운 인간상으로 ‘공생(共生)하는 인간’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적절히 절제하고 상호교감하면서 더불어 사는 모습을 얘기하는 듯하다.
사실, 멀지 않은 과거 어렵던 시절의 우리네 풍속이며 인정이 그랬지 않았나 싶다.
쌀 한 톨, 콩 한쪽이라도 나누고, 감 하나도 까치를 위해 남겨두던 것이 우리의 정서이지 않았나. 추억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지만, 현실에선 왠지 이놈의 ‘이기적 유전자’에 진즉부터 점령당한 거 같아 씁쓸한 자책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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