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나 알고 있듯이 지옥이란 한 번 떨어지면 헤어날 수 없는 곳이다.
영원히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게 된다. 살아서 지옥을 본다면, 어떤 이라도 ‘착하게 살아야겠다’ 싶을 것이다.
개미지옥은 개미에게 지옥인 곳이다.
한 번 떨어지면 개미가 절대 살아 나올 수 없다. 명주잠자리 애벌레인 개미귀신이 구덩이를 딱 파고 숨어 있다 개미가 빠지면 모래를 뿌려 잡아먹는다. 도망가려 발버둥 치면 칠수록 늪처럼 더 깊이 빠져든다.
불쌍한 개미의 잘못이라면 지옥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걸 모르고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한 발자국만 옆으로 비켜갔다면 자기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개미가 그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개미지옥도 지옥이 될 수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이런 개미지옥과 비슷한 게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자신의 ‘나와바리’를 딱 정해놓고 그 안에만 머물 뿐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위너(winner)가 될 수 있는 조건에서만 움직인다.
본인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라 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내가 잘하는 조건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조건에서만 싸우는 것이니 시작도 하기 전에 이긴 거나 다름없다. ‘이겨놓고 싸운다’는 손자병법 같다. 늘 이기는 싸움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고 많은 넓은 땅 중에서 한 뼘도 안 되는 구덩이를 파놓고 그 조건만을 들이대는 건 개미귀신처럼 볼품없는 것들에나 의미 있지 않을까.
갈 데도 많고 할 것도 천지 삐까리인데 꼭 그렇게 살아야 되나 싶다.
물론, 실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남 뒤치다꺼리나 하는 걸 옹호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일상생활에서마저 그런 심리적 테두리를 쳐놓고 꼭 살아야 되냐는 것이다. 세상이 팍팍해지는 게 서로 자기의 철옹성을 쌓고 거기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아서다.
별 큰 문제가 아니라면, 알면서도 모른 척 남을 위해 각설이 춤 한 번 쳐 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또 내가 주인공일 땐 그 사람이 나를 위해 광대가 되어주고. 그러면 조금은 사람 사는 맛이 나지 않을까?
자기만 아는 어린애야 늘 이겨서 좋겠지만, 어울려 사는 사회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겠나.
사실 거꾸로 생각하면, 그 ‘나와바리’가 결국 자신의 한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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