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수필

둔감력

장 산 2021. 4. 27. 11:10

출처: 한국일보

 

살면서 듣기 싫은 말이 많겠지만 당신 참 둔하다라는 얘기도 그중에 하나일 것이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둔한 것 보다야 감각이 뛰어나다혹은 샤프하다는 소리를 더 듣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일반적으로 둔함 = 눈치 없음으로 등치(等値)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주어진 상황에 맞는 말이나 행동을 재바르게 할 수 있다는 건 본인에게 큰 이익이 될 수 있다.눈치가 빠르면 절간에서 새우젓 먹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황 파악을 잘해 손해 볼 일은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눈치 빠른 사람들은 남에게 안 좋은 소리 듣는 걸 싫어하고 주위의 반응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경향이 강하다.

조직에서 힘이 어디로 쏠리는 지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래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정확하게 안다.

 

그런데, 살다보면 내가 눈치 빠르게 사실을 알아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그걸 이해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세상에는 이런저런 성격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감한 사람들의 경우 그 민감함 때문에 늘 다양한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곤 한다.

 

나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온갖 고려를 했는데 저 쪽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할 때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혹은 슬쩍 돌려 말해도 될 것을 대놓고 세게 얘기할 땐 마음의 내상(內傷)이 깊다. 아니면 괜히 나 혼자 지레짐작으로 미리 행동했다가 낙동강 오리알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땐 일본 정형외과 의사가 쓴 실락원(失樂園)’에 나오는 둔감력(鈍感力)’이라는 용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둔감한 것이 건강과 성공을 위해 훨씬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암을 이기는 데에도 둔감한 것이 낫고, 위궤양이나 장이 안 좋은 것도 과민한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랑이나 결혼생활에서도 변덕이나 잔소리에 무덤덤한 것이 결국은 원만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심지어 모기에 물렸을 때도 예민하면 금방 부어오르고 가려워 긁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인턴 시절, 의술은 아주 뛰어난 반면 가슴에 못질하는 잔소리로 유명한 교수가 있었다고 한다. 수술 실습 때, 다른 학생들은 실수할까 봐 지나치게 긴장해 결국은 진짜 실수하게 되고 이는 다시 교수의 심한 질책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제자(弟子)가 되지 못한 반면, 한 학생은 그걸 묵묵히 다 들어주고 다음날 웃으며 인사까지 건넴으로써 지도교수의 의술을 모두 전수받았음은 물론 그 후광으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살면서 스트레스를 안 받을 재주가 있느냐?’고 얘기들 한다.

사실, 어렵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면 큰 장점이 될 것이다. 가장 바람직한 경우라면, 내게 오는 스트레스엔 의도적으로 둔감하고, 남에 대해선 세심하게 배려하는 복합적 대처일 것이다.

 

알면서 둔감할 수 있다면 그건 이중인격이 아니다. 알아도 그럴 수 없는 게 오히려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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