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대화가 필요해’라는 코너가 있었다. 경상도 가족이 식탁에서 대화를 나누는데, 늘 서로 핀트가 안 맞다. 특히 사오정 같은 남편은 엉뚱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웃긴다. 예를 들면, ‘둘째 아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당신 뭐 했어?’하고 호통을 치면 집사람이 ‘우리 아는 하납니다’ 하는 식이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집안만 대화가 필요한 건 아닐 것이다. 기업, 학교, 병원, 동호회 등 사람이 모인 어디나 소통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검찰, 군대 등 소위 군기가 센 집단일수록 특히 더 하다. 조직 특성상 속도와 결과를 중시해 의사결정이 상의하달(上意下達)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는 대게 소통도 날 잡아 몰아서 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회식(會食)을 통해서이다. 아무래도 술이 들어가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마음에 있는 말을 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회식 주관자가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얘기하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문제는, 회식이 끝나고 나면 꼭 뒷말이 무성하게 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당연히 물정(物情) 모르는 순진한 신입(新入)이다. 술에 취해 부서장이 듣기 싫은 얘기를 허심탄회하게 질러버려서이다. 혈기가 왕성해서 선배들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읊는 모습이 비겁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 친구는 한동안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시간을 보낸 뒤 점차 허심탄회의 깊은 뜻을 알게 된다. 조직사회에서 허심탄회란 ‘허심탄회하게 아부하라’는 말과 통한다.
'허심탄회'란 마치, 조선시대 왕이 신하들의 충성을 떠보기 위해 왕위를 넘기겠다고 선언하는 ‘양위(讓位)’와 비슷하다. 만일 이걸 곧이곧대로 믿어서 좋아라 했다가는 바로 역적이 되기 십상이다. 왕이 양위한다고 하면 반드시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해야 충신이 될 수 있다.
걸핏하면 이런 양위 쇼로 신하들 군기를 잡은 왕으로 선조(宣祖)가 유명하다.
코로나가 창궐한 세상에 무슨 회식이며 갑질 하면 난리 나는 시대에 웬 구닥다리 같은 얘기냐 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럼 이런 인위적인 관계 말고 피를 나눈 가족끼리라면 내 얘기를 잘 들어줄까?
명절이나 제사 등 큰일이 있어 흩어진 가족들이 모이면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얘기들을 쏟아낸다. 처음엔 다른 가족들 안부를 묻나 싶다가 이내 자기 사는 어려움을 하소연하게 된다. 어릴 때부터 보아온 터라 서로 만만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사는 게 힘든 건 누구나 마찬가지라 그 얘길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자기들의 어려움에 비해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구박을 한다. 이렇게 해서, 가족에게 위로받으려던 기대감이 급전직하(急轉直下) 배신감으로 바뀌면서 정겨워야 할 자리에 분란만 생기게 된다. 명절마다 신문에 나는 사건·사고가 다 이렇지 않나.
허심탄회하게 말하다 사달이 나는 건 내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당신이니까 들어줘야 된다’는 과한 믿음이 격한 언행(言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런 대화가 주로 안면(顔面)이 있는 관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영 모르면 허심탄회할 일도 없을 것이다.
사기업이나 공조직, 혹은 가족끼리이든지 간에 누가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면 긴장할 필요가 있다. 십중팔구, 그 사람이 참아왔던 얘기가 있다는 뜻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왜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 그러겠나?
이럴 땐 ‘나를 시험하는구나’ 생각해야 된다. 눈 딱 감고 우선 상대방 칭찬이나 감사의 말로 시작하는 게 현명하다. 그러면 아마 상대도 '내가 오해했나?' 싶어 진짜 허심탄회해질지 모른다.
속 보이는 수작 같지만, 내가 상대에게 허심탄회한 대화를 기대할 때의 그 마음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일이다. ‘대화가 필요해’에서도 자기로 인해 분위기가 썰렁해지면 아부지가 센스 있게 한마디 한다. “밥 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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