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수필

출발점

장 산 2021. 3. 30. 06:12

<400m 출발선> 출처:아시아경제

 

육상에서 200미터 이상 달리기의 출발점은 제 각각이다.

곡선 주로(走路)를 달릴 때 바깥쪽 주자(走者)의 손해를 보상해 주어야만 공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견 저만치 앞서 있는 듯해도 실은 정확히 같은 출발점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1등과 꼴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기에 애초의 공평함이 결과적으로 큰 의미 없게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출발점을 같이 한 시합, 그러니까 승리의 기회가 확률적으로 공평하게 주어진 상태에서는 패배의 쓰라림이 좀 덜할 듯싶다. 다 제 능력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언젠가, 아주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난 어느 언론사주가 재산이 많은 것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못마땅하게 보이겠지만 애초부터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취지의 말을 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존재였을 것이다. 주제를 모르고 갈잎을 먹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the others) 입장에서는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있나? (王侯將相 寧有種乎)’라는 생각임에 틀림없다.

 

얼핏 들으면 모두 일리(一理) 있는 듯하지만, 내 보기엔 둘 다 아닌 것 같다.

소위 잔인한 현실론좋은 환경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의심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천지개벽의 희망론왕후장상같이 잘 나고 부자인 사람이 왜 늘 소수인가에 대해 시원한 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때면 자꾸 비교해보는 습성이 처녀 봄바람난 것처럼 생겨난다.

이 친구는 언제 저렇게 돈을 많이 벌었어?’, ‘저 친구는 직업이 좋아 목에 힘줄만 하겠네등 나름대로 이리저리 평가를 해댄다. 그리고선, ‘저 친구가 옛날에는 비실비실했는데 운수가 대통했나 보네?’라고 위안을 삼다가, 결국엔 지가 언제부터 잘났다고 저렇게 건방을 떨어라고 올가미를 씌운다.

각설이처럼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다 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열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는 출발점이 서로 비슷했는데 이젠 확연히 달라진 현실에 대한 자괴감인 것이다. 남이 힘들 때 도와준 거 하나 없으면서 잘 되니 배 아파하는 참 고약한 심보가 드러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누가 나를 몰라봐도 열 받지 마라는 공자님 말씀도 생각나고,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는 부처님 말씀도 떠오른다.

평생을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았던 루소(J. J. Rousseau) 는 인생의 불행이 바로 남과의 비교에서 비롯된다고 봤다. 괜히 비교하게 되면, 남이 잘나갈 땐 내 처지를 탓할 테고 내가 좀 나은 듯하면 그땐 남을 우습게 본다는 의미이다.

 

비교는 늘 승자와 패자, 잘난 인간과 못난 놈, 많이 배운 사람과 못 배운 놈, 부자와 가난뱅이 등 흑백논리를 전제로 한다.

내 중심이니 당연히 절대적 기준도 없다. 그러니 합리적 근거가 있을 리 만무하고, 비교대상도 천지 모든 사람이라 한도 끝도 없다.

 

얘기가 겉돌아 트랙(track)에서 벗어난 것 같다.

달리기의 거리는 꼴찌 할 선수나 일등 할 선수 모두에게 똑 같이 주어진다. 파울(foul)을 하지 않는 한 질러갈 방법도 없다. 물론 선수 개개인의 키, 몸무게, 팔다리 길이, 호흡량 등은 모두 다르다. 운동화도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걸 가지고 다른 선수와 비교하진 않는다.

설령 그게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조건이 불평등하다고 남을 비난할 순 없다. 그걸 문제 삼으면 그 사람은 물론이고 내 존재 자체도 부정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절대적 평등이란 애초 있을 수 없는 신기루 인지도 모르겠다.

시합에서 나와 똑같은 신체조건을 가진 선수들을 어떻게 찾을 수 있으며, 혹 찾는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로봇처럼 똑같은 조건이라면 결국 결과도 똑같을 것이니 시합이 무의미해질 건 뻔한 이치이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면서 각자의 출발점을 떠나 나름의 인생경로를 따라 달린다.

물론, 나보다 뛰어난 신체조건에 더 좋은 신발을 신은 사람이 다리가 짧고 맨발인 나보다 유리할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더군다나, 트랙이 아닌 삶의 달리기에서는 설사 내가 바깥 주로에 있다고 한들 친절하게 거리를 보정(補正) 해 주는 일은 천지간에 없다.

 

그러니 이빨 깨물고 무조건 달려야 한다.

짧은 다리를 한탄하고 운동화를 탓할 여유도 또 이유도 없다. 맨발이라고 달리기를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남이 맨발은 안타까워할 순 있어도 뛰지 않는 걸 동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남에게 이기고 지는 건 부차적 문제일 지 모른다.  

중요한 건 내가 열심히 달렸느냐 여부이다. 인생 마지막에 남는 건 짧은 다리나 싸구려 운동화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좀 더 진중한 얘기들로 채워질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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