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다 보면 한창 잎이 무성해지는 5월인데도 가로수 가지치기하는 걸 종종 보게 된다.
가지들이 싹둑 잘려나가 굵은 가지만 덩그러니 남아 마치 겨울 나목(裸木)을 보는 것 같다. 너무 심하게 잘라 미관도 안 좋을뿐더러 왠지 마음까지 불편해 심히 보기가 좋지 않다.
‘가로수 가지치기를 왜 할까?’ 자문해 본다.
두말 할 나위 없이 나무가 잘 자라도록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병충해를 차단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자란 잔가지를 제거해 나무가 전체적으로 튼실히 자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
거리에 심은 가로수이니 지나는 사람들이 보기 좋으라고 할 수도 있다. 잘 정돈된 나무가 가로수로 있는 게 목적에 맞을 것이다. 빗질을 하지 않은 더부룩한 머리보다야 모양 좋게 스타일링한 게 좋아 보이는 건 인지상정이다.
현실적으로, 전깃줄이 걸리거나 건물에 입주한 사람들이 불편해해서 가지치기를 할 수도 있다. 전깃줄이 합선되거나 전화선이 끊어지면 안 되니 명분은 충분하겠다. 건물에 입주한 가게의 간판이 잘 보이게 혹은 시야가 방해받지 않도록 가지치기를 요구할 수도 있다.
어느 것 하나 합당하지 않은 이유가 없다. 반박할 수 없이 모두 일리(一理)가 있다.
근데 나무를 보면 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일까? 목적이 선(善)하면 결과도 아름다워야 하는데 나타난 모양새는 아름답긴커녕 화가 날 정도이다. 아픈 사람 치료해주고, 못 난 사람 이쁘게 해 준다면서 오히려 더 망쳐놓은 것과 같다.
노인네 팔순 잔치에 주인공은 온데간데없고, 자식들만 남아 먹고 노는 것과 같이 가지치기에 나무는 없다.
가지치기할 나무가 중요한 것이지 길거리에 서 있는 나무 자체는 고려대상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나무를 그처럼 잘 살 수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게 만들 수가 있겠나.
‘가지치기를 안 하면 누가 답답하고, 했을 때 누구에게 득이 되는지?’를 따져보면 답이 나올 듯하다.
막말로 나무 입장에서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오히려 지금처럼 싹둑 잘렸을 때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생장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에겐 크게 덕이라고 할 수 없다.
지나가는 시민들 입장에서도 그렇게 앙상하게 잘려나간 가지가 보기 좋을 리 만무하다.
봐서 마음이 편치 않은 데 어떻게 아름답게 느낄 수 있을까. 그런 나무를 보면서 위안을 얻기란 난망한 일이다.
그럼, 마지막 남은 명분인 가게 간판이 잘 보이도록 자르는 것은 누구에게 이익이 될까?
이 목적이라면 나무를 시원하게 자르면 자를수록 좋다. 나무는 그저 잘려나가야 될 대상일 뿐이다.
그렇게 볼품없이, 그리고 막무가내로 자를 거면 뭣 하러 공들여 가로수를 심었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뽑아버리면 매년 가지치기하는 수고와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해 안 되는 일들이 가끔 있는데 가로수 가지치기도 그중 하나이다.
보기도 좋고, 가게주인도 만족하며, 나무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런 아름다운 가지치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만 경청할 게 아니라 말 못 하는 나무와 조용한 산책자들의 심정도 함께 헤아려야 한다. 그 나무에 둥지를 틀 새들도 생각해야 된다. 그게 함께 사는 공동체를 위한 합리적 배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