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수필

독 없는 구렁이가 독사를 잡아먹는다

장 산 2021. 3. 21. 23:40

출처: 중앙일보

 

봄은 벌써 왔으니 이제 하루하루 따뜻해질 일만 남았다.

바야흐로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자기 존재를 드러낼 시기이다. 개구리는 지난 경칩 때 벌써 나와 연못에 알까지 잔뜩 낳아 놓았다. 새들도 안전한 나뭇가지 위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새끼를 기르고 있다.


이런저런 뱀들도 곧 나올 터인데 솔직히 안 볼 순 없을까 싶다.

다 조물주의 뜻이겠지만, 생긴 것도 징그러운 데 사악하다는 고정관념까지 덧 씌워져 마음이 개운하지 않아서다. 멋모르고 걷다가 풀숲의 뱀을 보고 기겁을 했던 기억도 난다. 뭐 그런다고 내 뜻대로 될 일은 만무하다.


가장 위협적인 뱀은 두말할 필요 없이 독사다.

소리 없이 스르르 접근해 순식간에 독니로 독을 주입하면 그야말로 치명적이다. 은밀하게 상대를 기습하는 것도 그런 데 치명적 독까지 지녔으니 얼마나 무서운 가. 뱀에게 독은 확실히 비장의 생존 무기임에 틀림없다.

 


반면에, 구렁이는 뱀 중에서 제일 행동이 굼뜨다.

조심성이 많은지 사람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느릿느릿 움직이면서 게다가 독까지 없다. 저렇게 해서 쥐 한 마리나 제대로 잡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신기한 건, 독 없는 구렁이가 독사를 잡는다는 사실이다.

독사의 치명적인 독이 구렁이에겐 안 통하는지 구렁이 앞에선 쥐 보다 못한 신세가 된다. 잽싸게 도망가면 될 것 같은데 그리 못하는 걸 보면 조물주의 뜻인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사는 세상에도 이와 비슷한 이치가 작동하는 것 같다면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일까? 

눈앞에서는 늘 재바르고 치밀하며 독한 사람이 이익을 챙기는 듯하지만, 긴 호흡으로 보면 결국 사회에서 환영받거나 존경받는 사람은 하나같이 소박하고 겸손하며 독하지 않다. 아니 독해도 남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그렇다.


사실 일상생활에서 느리고 독기도 없으면 여기저기 치이고 밟히는 일이 비일비재할 수 있다. 

그래도 다른 동물과 달리 만물의 영장으로서 공동사회를 위해 합리적 선택을 해 온 게 호모 사피엔스이다. 혹간 남에게 독한 놈들이 살아남는 게 적자생존 같지만 그건 독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관용 때문일 것이다.


영악(靈惡)한 독사가 느리고 독 없는 구렁이한테 어쩌지 못하는 건 어쩌면 신의 한 수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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